하관
박목월
관(棺)이 내렸다.
깊은 가슴 안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주여
용납하옵소서.
머리맡에 성경을 얹어 주고
나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좌르르 하직(下直)했다.
그 후로
그를 꿈에서 만났다.
턱이 긴 얼굴이 나를 돌아보고
형님!
불렀다.
오오냐. 나는 전신(全身)으로 대답했다.
그래도 그는 못 들었으리라.
이제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너는 어디로 갔느냐
그 어질고 안스럽고 다정한 눈짓을 하고.
형님!
부르는 목소리는 들리는데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다만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난(蘭), 기타> 1959
박목월. 언젯적 시인인가 싶은 사람. 그가 이렇듯 멀리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견디는 세계가 너무 빠르고 가혹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관>은 아우의 죽음, 제목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했듯 장지에서의 하관장면을 언급하고 있다. 흔히 우리들이 보는 시적 전경은 사건이 속한 공간의 주변환경을 통해 환기되고 이미지화 되지만, 이 시는 이런 외적 환경들이 배제되고 화자 자신과 망자의 관에 흙을 끼얹는 의식, 죽은 이와의 '상상의 대화' 등으로 구성되어있다. 시인의 이런 프레임은 시가 시인과 죽은 망자와의 관계에 국한되리라는 일종의 지침과도 같다. 대부분의 전통시들이 갖는 이 단순한 구조는 작가의 생각을 독자에게 투영시키기가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는 가족의 죽음을 다룬 정지용의 모더니즘의 시 <유리창>과 극명히 달라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어쨌거나 시인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네 음성을/나만 듣는 여기는 눈과 비가 오는 세상', '열매가 떨어지면 툭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 이라는 두 문장 속에 다 들어있다. 죽음은 망자를 기억의 저편으로 묻어버린다. 살아있는 이들이 더는 볼수도 없고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 이런 애절함이 화자에게 '형님!' 이라는 환청으로 들리지만, 시인 자신도 안다, 그 부름을 자신만이 듣는다는 것을. 이런 청각적 이미지의 효력을 배가시키는 말이 마지막 행의 '툭'이다. 별다른 강조가 없기 때문일까? 관의 널 위에 떨어지는 잔돌 하나처럼 저세상까지 울릴만큼 메아리를 남긴다. 특이하게 구어체의 말법이 객관화시키기 힘든 형제간의 애절한 사별의 심사를 되레 주관쪽으로 당겨놓고 도드라지게 한다. 요즘의 시에서는 흔하지만, 그 즈음에는 충분히 독특했을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