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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랑/•‥내가읽은좋은시

가구의 힘/박형준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가구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가구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가구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법이다
가구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ㅡ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자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가구론을 펼쳤다


막 시인이 된 한 사람의 시를 읽으면서 저렇게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1991년의 첫날이었습니다. 배달된 한국일보를 펼치자 그 해의 신춘문예 등단작이 실려 있었어요. 박형준 시인의 '가구의 힘'이었죠. 가족들이 신문을 읽기도 전인데 오려서 벽에 붙여두고 오래도록 읽었습니다. 그런 아름다운 시로 등단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다음해 저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습니다. 물론 낙방이었지요.

얼마 전 시인의 다섯 번째 시집이 나왔네요. 여전히 담담하면서도 절실했습니다. 오래된 가구의 힘은 사실 그 가구를 처음 들여오던 날의 마음을 잊지 않는 데서 비롯되는 것 같아요. 그 기쁨을 매번 떠올리며 생채기의 기억들도 품고 추억도 만들어가는 것이겠지요.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 쉽지 않건만, 시인은 다섯 번이나 이사를 했는데도 그대로네요. 그의 시집을 펼치며 이십 년 전 그날처럼 마음이 설레옵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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