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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랑/•‥내가읽은좋은시

능소화/김선우


 

 

김선우 시인
1970년 강원도 강릉 출생
강원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1996년 ≪창작과비평≫ 겨울호에 <대관령 옛길> 등 10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2001년 대산창작기금 수혜
2004년 제49회 현대문학상 수상 (당선詩 : 피어라, 석유!)
현재 '시힘' 동인
주요 저서 목록
첫시집『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비평사) 2000년 2월 1일
첫 산문집『물 밑에 달이 열릴 때』(창작과비평사) 2002년 3월 20일
시집『도화 아래 잠들다』(창작과비평사) 2003년 10

 

-------------------------------------------------게시된 시-----------------------------------------
 

능소화 / 김선우
봄날 오후 / 김선우
피어라, 석유! / 김선우
물 속의 여자들 / 김선우
고바우집 / 김선우
아나고의 하품 / 김선우
늙지 않는 집 / 김선우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그 많은 밥의 비유 / 김선우
요실금 / 김선우
나생이 / 김선우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개부처손 / 김선우
양변기 위에서 / 김선우
맑은 날 / 김선우
빌려 줄 몸 한 채 / 김선우
바늘귀 속의 두근거림 / 김선우 (산문)
내력 / 김선우   
완경(完經) / 김선우
등 / 김선우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
거미 / 김선우
퉁소/김선우

 

 

 

 

 


능소화 / 김선우

 


 꽃 피우기 좋은 계절 앙다물어 보내놓고 당신이나 나나 참 왜 이리 더디 늙는지 독하기로는 당신이 나보다 더한 셈 꽃시절 지날 동안 당신은 깊이 깊이 대궁 속으로만 찾아들어 나팔관 지나고 자궁을 거슬러 당신이 태어나지 않을 운명을 찾아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머니를 죽이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다 그러다 염천을 딱! 만난 것인데 이글거리는 밀랍 같은, 끓는 용암 같은, 염천을 능멸하며 붉은 웃음 퍼올려 몸 풀고 꽃술 달고 쟁쟁한 열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凌 야 凌 야, 모루에 올려진 시뻘건 쇳덩어리 찌챙찌챙 두드려 소리를 깨우고 갓 깨워놓은 소리가 하늘을 태울라 찌챙찌챙 담그고 두드려 울음을 잡는 장이처럼이야 쇠의 호흡 따라 뭉친 소리 풀어주고 성근 소리 묶어주며 깨워놓은 소리 다듬어내는 장이처럼 이야 아니되어도 凌 야 凌 야, 염천을 능멸하며 제 몸의 소리 스스로 깨뜨려 고수레― 던져올리는 사잣밥처럼 뭉텅뭉텅 햇살 베어 선연한 주홍빛 속내로만 오는 꽃대궁 속 나팔관을 지나고 자궁을 가로질러 우주 어딘가 시간을 삼킨 구멍을 찾아가는 당신 타는 울음 들어낼 귀가 딱 한순간은 어두운 내게도 오는 법, 덩굴 마디마다 못을 치며 당신이 염천 아래 자꾸만 아기 울음소리로 번져갈 때 나는 듣고 있었던 거라 향기마저 봉인하여 끌어안고 꽃받침 째 툭, 툭, 떨어져 내리는 붉디붉은 징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라

 


 

봄날 오후 /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 -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피어라, 석유! / 김선우


 

할 수만 있다면 어머니,나를 꽃 피워 주세요
당신의 몸 깊은 곳 오래도록 유전해온
검고 끈적한 이 핏방울
이 몸으로 인해 더러운 전쟁이 그치지 않아요
탐욕이 탐욕을 불러요 탐욕하는 자의 눈앞에
무용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무력한 꽃이 되게 해주세요.
온몸으로 꽃이어서 꽃의 운하여서
힘이 아닌 아름다움을 탐할 수 있었으면
찢겨져 매혈의 치욕을 감당해야 하는
어머니, 당신의 혈관으로 화염이 번져요
차라리 나를 향해 저주의 말을 뱉으세요
포화 속 겁에 질린 어린아이들의 발 앞에
검은 유골단지들을 내려놓을께요
목을 쳐주세요 흩뿌리는 꽃잎으로
벌거벗은 아이들의 상한 발을 덮을 수 있도록
꽃잎이 마르기 전 온몸의 기름을 짜
어머니, 낭자한 당신의 치욕을 씻길께요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물 속의 여자들  / 김선우

 

 

늦봄 저수지 둑 위에 앉아
물속을 오래 들여다보면
거기 무슨 잔치 벌였는지
북소리 징소리 어깨춤 법석입니다

 

바리공주 방울 흔들어 수문 열리자
시루떡 찌고 있는 명성황후가 보입니다
구름이 내려와 멍석을 펼치고
축문을 쓰고 있는 황진이 쪽찐 머리
가르마 따라 흰 새 날고 바람 불어옵니다
난설헌이 어린 남매를 위해 소지를 사르다가
문득 눈을 들어 감나무를 봅니다
우듬지에 걸려 펄럭이는 나비연
황진이가 다가와 장옷을 걸쳐줍니다
두 여자 마주보고 하하 웃습니다
명성황후 다가와 붉은 석류를 내밉니다
석류알 새금새금 발라 먹으며
세 여자 찡그려 하하하 웃습니다
물보라치는 눈물,
이승을 혼자 노닐다 온 여자들이
휘모리 장단을 칩니다 지전 흩어지고
까치밥마냥 미쳐서
술잔 속에 한 하늘이 천년을 헤매었습니다

 

물 속에 웬 잔치 벌였는고?
어머니 입 속에 상추쌈 넣어드리니

저수지의 봄날이 흐득 깊어갑니다

 

 

 

고바우집/김선우

 

 

 이상하지? 신촌 고바우집 연탄 불판 위에서 생고깃덩어리 익어갈 때, 두터운 비곗살로 불판을 쓱쓱 닦아가며 남루한 얼굴 몇이 맛나게 소금구이 먹고 있을 때

 

 엉치뼈나 갈비뼈 안짝 어디쯤서 내밀하게 움직이던 살들과 육체의 건너편에 밀집했던 비곗살, 살아서는 절대로 서로의 살을 만져줄 수 없던 것들이, 참 이상하지?

 

 새끼의 등짝을 핥아주고 암내도 풍기곤 했을 처형된 욕망의 덩어리들이 자기 살로 자기 살을 닦아주면서, 그리웠어 어쩌구 하는 것처럼 다정스레 냄새를 풍기더라니깐

 

 환한 알전구 주방의 큰 도마에선 붉게 상기된 아줌마들이 뭉청뭉청 돼지 한 마리 썰고 있었는데 내 살이 내 살을 닦아줄 그때처럼 신명나게 생고기를 썰고 있었는데

 

 축제의 무희처럼 상추를 활짝 펼쳐들고 방울, 단검, 고기 몇 점, 맛나게 싸서 삼키는 중에 이상하지?

 

산다는 게 갑자기 단순하게 경쾌해지고 화르륵 밝아지는, 안 보이던 나의 얼굴이 그때 갑자기 보이는 것이었거든
 
내일을 여는 작가(1998.가을)

 

 

 

아나고의 하품 / 김선우


                                   
  언젠가 횟집에서 아나고 한 마리 회 뜨는 걸 보았을 땐
 머리 쳐내고 껍질 벗겨내면 그제사 퍼득퍼득, 몸통 전체로 희
디흰 슬픔의 가시 같은 게 되어 자꾸 머리를 찔러대는 걸 보았
을 땐
 머리는 점잖게 거의는 고독하게 한번 크게 입 벌려 생애 마지
막 하품을 하고는 영영 입 다물어버리는 것이었는데
 한 생명이 몹시도 고적해졌구나, 나는 조금 슬펐더랬다

 

 소록도를 지척에 둔 녹동 앞바다, 경매로 낙찰된 한 바구니의
아나고가 껍질 벗겨져 마흔 개의 머리 차례차례 입 따악 벌려 생
애 마지막 호흡 천천히 행하는 걸 보았을 땐
 웬일인지 슬픔이니 고독이니 끼여들 자리도 이미 없고
 이상스레 차분한 적멸, 같은 것이 내 마음에 공空으로만 번지는
것이었다

 

 원래 그들이 그러하였듯 돌아가야 할 무슨 연유라도 뜬금없이
생겼나보구나 이렇게만 생각이 들고
 아낙의 무심한 칼질과 아나고의 길고 조용한 하품을 그저 지켜
보는 것이었는데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냄새가 좀 흘렀지만 모든 과정은 이를 데
없이 평화로웠다

 

 눈을 들면 지척에 흰 사슴과 문둥이의 섬이 보이고 내 머리에
선 감청빛 뿔이 조금씩 돋아나 꼭 그만큼 손마디가 문드러지는
것이었다


-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피어라 석유!' 에서 -

 

 

 

늙지 않는 집 / 김선우 

 


저 집을 기억하네 정한 물 발라가며 참빗질을 하고 있는 여인네처럼

단정하게 앉은 그녀의 치마폭에서 늙수그레한 세 남자가 자그만 솥을 걸고

막걸리 추렴을 하고 있었네 새로 얹은 기와는 낭창하게 이쁜 청기와였네

꼬들꼬들한 풋봄의 바람이 한소끔씩 불어왔고 불가에 가차이 간 아직 좀 찬바람이

화들짝 알을 낳았는지 검댕 묻은 솥 위로 팔랑팔랑 노랑나비 날아 올랐

모여있던 세 남자 일제히 같은 고갯짓으로 하아-나비구나, 노랑나비로구나

눈가에 잔주름 접으며 청기와 지붕으로 노랑나비

낭창낭창 날아가는 것을 이윽토록 바라보고 있었네

 

 

 

오동나무의 웃음소리 / 김선우

 


  서른 해 넘도록 연인들과 노닐 때마다 내가 조금쯤 부끄러웠던 순간은 오줌 눌 때였었는데 문밖까지 소리 들리면 어쩌나 힘 주어 졸졸 개울물 만들거나 성급하게 변기 물을 폭포수로 내리며 일 보던 것인데

 

  마흔 넘은 여자들과 시골 산보를 하다가 오동나무 아래에서 오줌을 누게 된 것이었다 뜨듯한 흙냄새와 시원한 바람 속에 엉덩이 내놓은 여자들 사이, 나도 편안히 바지를 벗어 내린 것인데

 

  소리 한번 좋구나! 그중 맏언니가 운을 뗀 것이었다 젊었을땐 왜 그 소릴 부끄러워했나 몰라, 나이 드니 졸졸 개울물 소리 되려 창피해지더라고 내 오줌 누는 소리 시원타고 좋아라 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딸애들은 누구 오줌발이 더 힘이 좋은지, 더 넓게, 더 따뜻하게 번지는지 그런 놀이는 왜 못하고 자라는지 몰라, 궁금해하며 여자들 깔깔거리는 사이

 

  문밖까지 땅 끝까지 강물소리 자분자분 번져가고 푸른 잎새 축축 휘늘어지도록 열매 주렁주렁 매단 오동나무가 흐뭇하게 따님들을 굽어보시는 것이었다.

 

 

 

그 많은 밥의 비유 / 김선우

 

 

        밥상 앞에서 내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 몸속이 여전히 깜깜할지 어떨지
        희부연 미명이라도 깊은 어딘가를 비춰줄지 어떨지
        아, 입을 벌리는 순간 췌장 부근 어디거나 난소 어디께
        광속으로 몇억 년을 달려 막 내게 닿은 듯한
        그런 빛이 구불텅한 창자의 구석진 그늘
        부스스한 솜털들을 어루만져줄지 어떨지
       
        먼 어둠 속을 오래 떠돌던 무엇인가
        기어코 여기로 와 몸 받았듯이
        아직도 이 별에서 태어나는 것들
        소름끼치게 그리운 시방(十方)을 걸치고 있는 것

 

        내 몸속 어디에서 내가 나를 향해
        아, 입벌리네 자기 해골을 갈아 만든 피리를 불면서
        몸 사막을 건너는 순례자같이

 

        그대가 아, 입을 벌린 순간에
        내가 아, 입 벌리네 어둠 깊으니 그 어둠 받아먹네
        공기 속에 살내음 가득해 아아, 입 벌리고 폭풍 속에서
        비리디 비린 바람의 울혈을 받아먹네
        그대를 사랑하여 아, 아, 아, 나 자꾸 입 벌리네

 

 

 

요실금 / 김선우

 


일찍이 오줌을 지리는 병을 얻은 엄마는
네 번째 나를 낳았을 때 또 여자아이라서
쏟아진 양수와 핏덩이 흥건한 이부자리를 걷어
내처 개울로 빨래 가셨다고 합니다

 

음력 정월
요실금을 앓는 여자의 아랫도리처럼
얼음 사이로 소리 죽여 흘렀을 개울물,
결빙의 기억이 저를 다 가두지 못하도록
개울의 뿌리 아득한 곳으로부터
뜨거운 수액을 조금씩 흘려온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한의 겨울에도 동네마다
얼어붙지 않은 개울이 한두 개쯤 있었고
나는 종종 보곤 했던 것입니다
한겨울 비루해진 개울이 뜨거운 제 살 속에서
흰 눈을 폭포처럼 퍼올리는 것을

 

먼길을 걸어온 女子들이
흰눈을 뭉쳐 조금씩 녹여 먹으며
겨울나무 줄기에 귀를 대고 있었습니다
죽기 전에 오줌 한 번 시원하게 눠봤으면 좋겠다던
엄마의 문이 눈밭 위에서 활짝 열리곤 하였습니다

 

'포에지' (2000 겨울호)

 

 

 

나생이 / 김선우

 


나생이는 냉이의 내 고향 사투리
울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나생이꽃 피어 쇠기 전에
철따라 다른 풀잎 보내주시는 들녘에
늦지 않게 나가보려고 조바심을 낸 적이 있다
아지랑이 피는 구릉에 앉아 따스한 소피를 본 적이 있다

 

엄마도 할머니도 순이도 나도
그 자그맣고 매촘하니 싸아한 것을 나생이라 불렀는데
그 때의 그 '나새이'는 도대체 적어볼 수가 없다

 

흙살 속에 오롯하니 흰 뿌리 드리우듯
아래로 스며드는 발음인 '나'를
다치지 않게 살짝만 당겨 올리면서
햇살을 조물락거리듯
공기 속에 알주머리를 달아주듯
'이'를 궁글려 '새'를 건너가게 하는

 

그 '나새이',
허공에 난 새들의 길목
울 엄마와 할머니와 순이와 내가
봄 들녘에 쪼그려앉아 두 귀를 모으고 듣던
그 자그마하나 수런수런 깃 치는 연두빛 소리를
그 짜릿한 요기(尿氣)를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 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생애를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어낸 몇낱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큰하게 흐르는 향기,
아직 그리워할 것이 남아 있음을 증거해야겠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를 무릅써야겠네 아주 오래도록 그대와, 살고 싶은 뜻밖의 봄날
흡혈하듯 그대의 색을 탐해야겠네

 

 

 

개부처손 /김선우

 

 

개두릅 개복숭아 개살구 개머루 개꿈 개떡 같은
참 것이나 좋은 것이 아닌 함부로 된 걸 말하는 개, 라는 접두사가
부처님 손바닥처럼 생긴 풀 앞에 그것도 좀 모자란 듯한 잘디잔 손바닥
앞에 이름 붙어
개부처손이라 했다

 

납작한 바위를 감싸며 깊은 그늘 만들고 있는
고작 엄지손톱만한 초록빛 개부처손 앞에서 서성거린다

 

저잣거리의 좀 덜된 무명씨 같은 이도 부처 될 만하다는 것 같기도 하고
막된 人事보다 개가 부처를 이루는 게 도리라는 것도 같고
개나 소나 팽나무나 바위나 그저 데면데면하게 바라보던 것들 중에
이미 부처를 이룬 것들 수두룩할 것 같고

 

 

 

양변기 위에서 / 김선우

 

 

 어릴 적 어머니 따라 파밭에 갔다가 모락모락 똥 한무더기
밭둑에 누곤 하였는데 어머니 부드러운 애기호박잎으로
밑끔을 닦아주곤 하셨는데 똥무더기 옆에 엉겅퀴꽃 곱다랗게
흔들릴 때면 나는 좀 부끄러웠을라나 따끈하고 몰랑한 그것
한나절 햇살 아래 시남히 식어갈 때쯤 어머니 머릿수건에서
도 노릿노릿한 냄새가 풍겼을라나 야아-- 망 좀 보그라 호박
넌출 아래 슬며시 보이던 어머니 엉덩이는 차암 기분을 은근
하게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 알맞게 마른 내 똥 한무더기
밭고랑에 던지며 늬들 것은 다아 거름이어야 하실 땐 어땠을
라나 나는 좀 으쓱하기도 했을라나

 

양변기 위에 걸터앉아 모락모락 김나던 그 똥 한무더기 생
각하는 저녁, 오늘 내가 먹은 건 도대체 거름이 되질 않고


 

 시집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기를 거부한다면 (창작과비평사)


 

 

맑은 날 / 김선우

 


동사무소를 지나다 보았다
다리가 주저앉고 서랍이 떨어져나간 장롱

 

누군가 측은한 눈길 보내기도 했지만
적당한 균형을 지키는 것이
갑절의 굴욕이었을지 모른다

 

물림쇠가 녹슬고
문짝에서 먼지가 한움큼씩 떨어질 때
흔쾌한 마음으로 장롱은 노래했으리
오대산의 나무는
오대산 햇살 속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살이었던
못들은 광맥의 어둠으로 돌아가네 잠시 내 뼈였던

 

저의 중심에 무엇이든 붙박고자 하는
중력의 욕망을 배반한 것들은 아름답다
솟구쳐 쪼개지며 다리를 꺾는 순간
비로소 사랑을 완성하는 때
돌팔매질 당할 사랑을 꿈꾸어도 좋은 때

 

죽기 좋은 맑은 날
쓰레기 수거증이 붙어 있는
환하고 뜨거운 심장을 보았다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 (2001년 창작과비평사)

 

 

 

빌려 줄 몸 한 채 / 김선우

 

 

속이 꽉 찬 배추가 본디 속부터

단단하게 옹이지며 자라는 줄 알았는데

겉잎 속잎이랄 것 없이

저 벌어지고 싶은 마음대로 벌어져 자라다가

그 중 땅에 가까운 잎 몇 장이 스스로 겉잎 되어

나비에게도 몸을 주고 벌레에게도 몸을 주고

즐거이 자기 몸을 빌려주는 사이

결구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라

알불을 달듯 속이 차오는 거라

마음이 이미 길 떠나 있어

몸도 곧 길 위에 있게 될 늦은 계절에

채마밭 조금 빌려 무심코 배추 모종 심어본 후에

알게 된 것이다

빌려줄 몸 없이는 저녁이 없다는 걸

내 몸으로 짓는 공양간 없이는

등불 하나 오지 않는다는걸

처음 자리에 길은 없는 거였다

 

 


바늘귀 속의 두근거림 / 김선우 (산문)

 


 바늘을 들여다본다. 바늘귀가 두근거린다. 깁고 이어붙이고 꽃봉오리 같은 단추를 매달아주기 위해 바늘은 오늘도 온몸으로 귀기울인다. 우리가 사용하는 거의 모든 사물들은 자연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 있다. 바늘은 당신 속의 그 무엇인가를 닮아 있다. 최초의 바늘은 아마도 짐승의 뼈였으리라. 구멍이 뚫려 있는 날카로운 뼈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구멍에 가죽실을 꿰었던 최초의 석기인들을 생각한다. 벗은 몸이 추웠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벗은 몸의 아이와 사랑하는 사람을 걱정하던 날들이 있었을 것이다. 연민하고 글썽이며 두근거리던 마음이 최초의 뼈바늘로 최초의 가죽옷을 지었을 것이다. 


제일제당 사외보 2003년 5,6월호 -  바늘中에서 부분

 

 

 

내력 / 김선우

 

 

  몸져누운 어머니의 예순여섯 생신날
  고향에 가 소변을 받아드리다 보았네
  한때 무성한 숲이었을 음부
  더운 이슬 고인 밤 풀여치들의
  사랑이 농익어 달 부풀던 그곳에
  황토먼지 날리는 된비알이 있었네
  비탈진 밭에서 젊음을 혹사시킨
  산간 마을 여인의 성기는 비탈을 닮아간다는,
  세간 속설이 내 마음에 천둥 소낙비 뿌려
  어머니 몸을 닦아드리다 온통 내가 젖는데
  겅성드뭇한 산비알
  열매가 꽃으로 씨앗으로 흙으로
  되돌아가는 소슬한 평화를 보았네
  부끄러워 무릎을 끙, 세우는
  어머니의 비알밭은 어린 여자아이의
  밋밋하고 앳된 잠지를 닮아 있었네
  돌아갈 채비를 끝내고 있었네


시집 - 내 혀가 입 속에 갇혀 있길 거부한다면(창작과 비평사)

 

 

 

완경(完經)  / 김선우

 

 

 수련 열리다
 닫히다
 열리다
 닫히다
 닷새를 진분홍 꽃잎 열고 닫은 후
 초록 연잎 위에 아주 누워 일어나지 않는다
 선정에 든 와불 같다
 수련의 하루를 당신의 십 년이라고 할까
 엄마는 쉰 살부터 더는 꽃이 비치지 않았다 했다
 피고 지던 팽팽한
 적의赤衣의 화두마저 걷어버린
 당신의 중심에 고인 허공
 나는 꽃을 거둔 수련에게 속삭인다
 폐경이라니, 엄마,
 완경이야, 완경!

 

 

 

/ 김선우

 

 

아이 업은 사람이
등 뒤에 두 손을 포개 잡듯이
등 뒤에 두 날개를 포개 얹고
죽은 새
 

머리와 꽁지는 벌써 돌아갔는지
검은 등만 오롯하다
 

왜 등만 가장 나중까지 남았을까,
묻지 못한다
 

안 보이는 부리를 오물거리며
흙 속의 누군가에게
무언가 먹이고 있는 듯한
그때마다 작은 등이 움직거리는 듯한


죽은 새의 등에
업혀 있는 것 아직 많다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 김선우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풀여치 있어 풀여치와 놀았습니다
분홍빛 몽돌 어여뻐 몽돌과 놀았습니다
보랏빛 자디잔 꽃마리 어여뻐
사랑한다 말했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흰 사슴 마시고 숨결 흘려놓은 샘물 마셨습니다
샘물 달고 달아 낮별 뜨며 놀았습니다
새 뿔 올린 사향노루 너무 예뻐서
슬퍼진 내가 비파를 탔습니다 그대 만나러 가는 길에
잡아주고 싶은 새들의 가녀린 발목 종종거리며 뛰고
하늬바람 채집하는 나비 떼 외로워서
멍석을 펴고 함께 놀았습니다 껍질 벗는 자작나무
진물 환한 상처가 뜨거워서
가락을 함께 놀았습니다 회화나무 명자나무와 놀고
해당화 패랭이꽃 도라지 작약과 놀고
꽃아그배 아래 낮달과 놀았습니다
달과 꽃의 숨구멍에서 흘러나온 빛들 어여뻐
아주 잊듯 한참을 놀았습니다 그대 잃은 지 오래인
그대 만나러 가는 길
내가 만나 논 것들 모두 그대였습니다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거미 / 김선우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퉁소 / 김선우

 

 

        평범하기 그지없던 어느 일요일 낮잠에서 깨어난 내가
        잠자는 동안 우주가 맑아졌어, 라고 중얼거렸다
        알 수 없지만, 할머니가 좋은 곳으로 가신 것 같았다


        그 시간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평범하기 그지없던 일요일
        가난한 연인들이 되풀이하며 걸었을 골목길을 걸었고
        쓰러져가는 담장의 뿌리를 환하게 적시며
        용케도 피어난 파꽃들의 무덤을 보았고
        변두리 야산 중턱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에 앉아
        상수리나무 우듬지를 오래도록 쳐다보았을 뿐
        평생토록 한곳에서 저렇게 흔들려도 좋겠구나,
        속삭이는 낮은 목소리 위에서
        생채기를 만들지 않고도 나무 그늘이 진자처럼 흔들렸다
        이름을 알지 못하는 노란 새가 퉁소 소리를 내며 울었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무심한 장난처럼
        가끔씩 구름 조각을 옮겨다 거는 동안
        나는 가만히 조을다 까마득한 낮잠에 들었을 뿐
        너무 길지 않은, 너무 짧지도 않은
        그 시간에 어떤 손들이 내 이마를 쓸고 지나간 걸까


        십이 년 전 돌아가신 할머니가 왜 갑자기 생겨났는지
        목젖 아래 깊은 항아리로부터
        우주, 라는 말이 왜 떠올라 왔는지 알 수 없지만
        한 나무에서 다른 나무로 노랫소리와 구름 조각을 옮기던
        새의 깃털 하나하나가 퉁소 구멍처럼 텅 비어
        맑게 울리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