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조용한 일/ 김사인
조용한 일/ 김사인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저녁
철이른 낙엽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저도 말없이 그냥 앉는다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창비,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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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첫 시집 이후 19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가만히 좋아하는」에는 같은 이름의 제목으로 된 시가 없다. 그러니까 이때까지만 해도 시집을 묶을 때는 수록 작품 가운데 한 편의 제목이나 본문의 한 대목으로 표지 이름을 삼는 게 보통인데 그 관행을 처음 파기한 셈이다. 따라서 시집에는 ‘가만히 좋아하는’이라는 표제작은 없다. 시집 속 작품 전반에 감도는 분위기를 뭉뚱그려 제목으로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굳이 이 제목을 갖다 붙여도 무방하지 싶은 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조용한 일’이다.
이 시가 어떻게 ‘가만히 좋아하는’ 분위기와 맥이 통하는가. 시의 내용에는 별다른 이야기가 없고 아무런 사건도 벌어진 것이 없다. ‘나’는 이렇다 할 목적이나 까닭 없이 그냥 가을 벤치에 앉아있었을 뿐이고, 철 이른 낙엽 한 장이 그 곁에 슬며시 내려앉은 게 다이다. 그것으로 상황 종료인데, 그게 고맙다니 이런 싱거운 사람 다 봤나 소리가 막 나올 참이다. 하지만 반응을 잠시만 미루고 마음의 눈으로 느릿하게 행간의 풍경을 쓰다듬어가다 보면 쿵, 마음 밭에 무언가 떨어지는 걸 경험할 것이다. 조락을 호들갑 뜰지 않고 바라보는 일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다”
우리는 흔히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는 말을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그 경우 대개는 참견을 달가워하지 않을 때 약간의 짜증을 섞어 내뱉곤 하는데, 이 상황은 그와는 달리 가만히 좋아지고 고맙기까지 하다. 딱히 이유랄 것도 없이 느닷없는 헛헛함에 혹은 생의 부질없음에 만사가 시들해지고 시큰둥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손전화기도 내던지고, 손목시계도 풀고, 안경도 벗어버린다. 윗도리 단추를 몇 개 풀고 최대한 헐거워진다. 눈꺼풀을 덮고서 뒤통수로 깍지 낀 두 손을 맞잡은 채 깊숙이 의자에 몸을 파묻는다.
살아온 날들의 회한과 살아갈 날들의 대책 없음이 몸을 오그라들게 한다. 무력감이 온몸을 음습한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받아놓은 이 소소한 숙제들은 내게 무슨 의미인가. 전과 다름없이 이대로 남은 생을 묵묵히 살아가도 좋은 걸까. 이 무기력하고 나태한 생을 무엇이 일깨워주랴. 채널 6번에서 시작한 티브이 리모컨이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눈을 붙잡아둘 곳이 없다. 바다에서 물고기 잡는 어부의 모습에 잠깐 눈길을 주었으나 이내 또 위로 올라간다. 지금의 이 상황은 비극인가 희극인가.
문득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때 이미 둘레의 모든 것들은 그저 존재 자체로 나를 돕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내 죽음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에게 이해되듯이 내 무위도 그러리라. 앉은 자리 곁으로 슬며시 내려앉는 낙엽처럼 나도 그에게 달리 해줄 것이 없기에 웃지도 않고 그저 씩 한 번 쳐다봐 주는 일. 적요의 힘으로 같이 고맙다고 눈을 마주친다. 실은 이런 것들이 다 고맙게 느껴질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너그러워지고 긍정의 힘, 포용의 능력도 생기는 법이다.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모든 것들, 참으로 고맙다. 이토록 조용한 마음 씀씀이가 어디 있을까. ‘가만히 좋아하는’ 일이 또 있으랴.
권순진
모차르트 -아베베름 코르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