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성미정
처음엔 당신의 착한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그러다 그 안에 숨겨진 발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리도 발 못지않게 사랑스럽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당신의 머리까지
그 머리를 감싼 곱슬머리까지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
삐딱하게 눌러쓴 모자였나요
약간 휘어진 새끼손가락이었나요
지금 당신은 저의 어디까지 사랑하나요
몇 번째 발가락에 이르렀나요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가 그러했듯이
당신도 언젠가 모든 걸 사랑하게 될 테니까요
구두에서 머리카락까지 모두 사랑한다면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은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것 아니냐고요
이제 끝난 게 아니냐고요 아닙니다
처음엔 당신의 구두를 사랑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의 구두가 가는 곳과
손길이 닿는 곳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나 시작입니다
- 시집『상상한 상자』(랜덤하우스중앙,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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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사랑스러워’ 어쩌고 ‘온종일 우울해도 널 보면 머리에 햇빛이 들어’ 이런 식의 가사를 포함한 노래가 있다. 유치함에 발가락이 오물시다가도 사랑이란 원래 그렇게 유치한 것 아니겠냐며 한 발 빼자 발가락이 다시 펴진다. 어쩌면 주변 사람이 볼 때 닭살 돋을 정도가 되어야 진정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사랑을 하면 함께 퇴행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퇴행이란 이를테면 장식을 걷어낸 민낯이거나 어린 시절로 돌아감을 의미하는데, 그러니까 어린 시절에 했던 유치한 행동을 함께 할 수 있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포장은 다르지만 ‘착한 구두’에서부터 ‘곱슬머리’까지 통째로 사랑한다는 이 시 역시 곰상스럽게 연애의 욕망을 드러내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다만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좋아하게 되었다고 말한 뒤 대뜸 ‘당신은 저의 어디부터 시작했나요’라고 되물으며 ‘혹시 제 가슴에만 머물러 있는 건 아닌가요’라고 따져 묻는다. 사랑의 진행상태와 잔존가치를 확인하는데, ‘당신에 대한 저의 사랑’이 ‘당신의 구두’와 ‘구두가 가는 곳’까지 뻗쳐 사랑을 하는데 비하여 당신의 사랑은 여전히 육체를 벗어나지 못한 것 아니냐며 미심쩍어 한다.
구두는 성적인 메타포를 숨기고 있다. 영화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식당 테이블 밑에서의 은밀한 발장난을 상상해보라. 그래서 구두는 섹시하다. 그렇다면 '착한 구두'는 무례하지 않는 당신의 성적 태도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시에서의 ‘저’는 몸의 에로틱에서 시작해서 ‘당신’의 구두가 향하는 곳까지 바라본다. 그가 구두를 신고 움직여 손길이 닿는 곳까지 사랑하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니체가 말했던 선악을 초월하고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수용하는 진정한 사랑의 경지라 할 수 있다. 사실이라면 그것은 언제나 새로운 사랑의 경험영역이며 시작이리라.
권순진
The color of the night / Lauren Chri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