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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흰 눈 속으로/강은교

산새정이 2013. 11. 19. 14:22

 

 

 흰 눈 속으로 / 강은교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송이 눈이 두 송이 눈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눈송이들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듯이

 

여보게, 껴안아야 하네

한 조각 얼음이 두 조각 얼음을 껴안듯이

한데 안은 얼음들 땅 위에 칭칭 감기듯이

함께 녹아 흐르기 위하여 감기듯이

 

그리하여 입맞춰야 하네

한 올 별빛이 두 올 별빛에 입맞추듯이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맞추듯이

 

눈이 쌓이는구나

흰 눈 속으로

한 사람이 길을 만들고 있구나

눈길 하나가 눈길 둘과 입맞추고 있구나

 

여보게, 오늘은 자네도

눈길 얼음길을 만들어야 하네

쓸쓸한 땅 위에 길을 일으켜야 하네.

 

 

- 시집 '벽 속의 편지/창작과비평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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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 예보한대로 눈에 관한 한 척박한 이 달구벌에도 시방 눈이 내린다. 샤방 샤방 눈이 온다. 정말로 강아지는 꼬랑지를 흔들며 뛰어다니고, 사람들의 걸음걸이도 제법 푹신하다. 참 귀한 손님이다. 그동안 저 중원 땅에만 ‘펄럭펄럭 허공을 채우던’ 것들이 오늘에야 이렇게 얌전히 오는구나. 오늘은 껴안을 만큼 오긴 올 것 같구나. ‘별빛들 밤새도록 쓸쓸한 땅에 입맞추듯이’ ‘눈이 쌓이는구나’ 길과 길의 문턱을 허물고 있구나. 경계를 지우고 있구나.

 

 지워진 경계 사이로 자전거 하나 넘어간다. 빨간 마티즈도 넌지시 기웃거린다. 강아지가 잠깐 멈춰 섰다가 다시 폴짝 뛰어간다. 검은 점퍼를 입은 한 청년이 눈이 내려앉은 머리를 한 번에 털며 고개를 꺾는데, 그동안 쓸쓸했던 땅에게 눈인사라도 하는 모양이다. 까치가 플라타너스 한 가지에서 저 가지로 푸드득 수평 이동한다. 때맞추어 나는 가슴에 묻어둔 30년 전의 눈 그림자 하나를 꺼내어 천천히 인화한다. 내가 일으킨 길 아닌데 ‘흰 눈 속으로’ 내가 칭칭 감긴다.

 

 

ACT4

 

Orinoco Flow / Enya
 


 

출처 : 詩하늘 통신
글쓴이 : 제4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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